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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일지

한일병원 사건 수사일지

한일병원 사건의 합동 수사팀

뉴욕공항경찰국에서 짐 맥거번 전 부국장과

이민국 수사과에서 특별수사관에 감사패 전달

한일 병원 사건은 강효흔 공인탐정이 해결한 사건 중 하나로 강효흔 탐정의 저서 [탐정은 벤쳐보다 낫다]에 실린 내용 이다.

강효흔 탐정의 첫 번째 사건이자 당대 한국 역사상 최대경제사건인 동시에 한.미간 최초의 범인인도를 실현했던 일대의 사건으로 언론이 뽑은 10 대뉴스로 선정됐던 [대성그룹 사건]을 비롯 롯데그룹 사건등의 상세한 사건 기록은 동아일보사 발행 [탐정은 벤쳐보다 낫다]에 실려 있습니다.

사건관련 언론의 보도 내용은 [언론보도]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  한일병원 사건

 

97년 1월  
막 퇴근할 무렵 전화벨이 울렸다.  
진주 한일병원의 사무장인데 사고가 터졌다는 것이다. 
아는 사람으로부터 연락처를 받았다며 도와 달라는 것이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 소개를 해주다니 !. 
고맙다는 인사라도 하려고 누구냐고 물었더니 그는 평소 알고 지내는 경찰관인데 인터넷을 검색하다 우연히 접한 우리 홈페이지를 보고 연락처를 알려 줬다는 것이다.  
미국주재 공관에 근무했던 사람이라면 범인송환 업무협력 문제로 상견례 정도라도 했었겠지만 그것도 아닌 전혀 얼굴도 모르는 날 소개하다니 고맙기 이를 때 없었다. 
그 동안 경찰청에서 미국 인터폴에 범인송환 협조를 요청했다는데 이렇다 할 진전이 없다는 것이다. 
마침 그 동안 해오던 사건이 마무리 단계에 있던 차에 누군지 모르지만 고마울 뿐이었다. 

수신 : 창원 지방 검찰청 진주지청 
사건번호 : 96 형제 12809 호 
피의자 : 정 진석(가명) 
죄명 : 사기


한일병원측의 고소장에 의하면 사건인즉 
[한일병원이 새로운 병원부지를 물색하고 있던 중 경남 사천시에서 (주)XX정비를 운영하던 정 진석이란자가 자신의 부지가 장차 새로운 동네의 진입로가 될것이라며 구입할 것을 제의, 계약금과 중도금을 지불했으나 계약을 이행치 않고 국외로 도주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땅은 계약이전에 이미 수 개의 금융기관에 싯가 이상으로 근저당이 되어있었고 심지어 부지의 일부는 타 개인에게 소유권을 넘겨준 상태였었다는 것이다. 또 계약시 전 사천시 시 의장이었던 부친의 이름을 거명하며 고소인의 인척을 소개인으로 내세워 불신의 소지를 미리 차단, 부동산의 문제점을 철저히 은폐하고 거액을 편취 도주했다]는 것이다. 
벌써 이 바닥에서는 7년째. 
난 이미 경제범의 추적 분야에서만큼은 베테랑으로 통하고 있었고 또 나 자신도 그렇게 자만하고  있었다.  
재계, 정계, 금융계, 종교계를 비롯 거액 계꾼까지 거의 모든 분야에 연관한 도피사건을 다루어왔다.  한번은 운좋게 바보같은 도피자를 만나 불과 2주만에 찾아낸 경우도 있었다.  
난 이 분야에서 만큼은 최고라고 자만에 자만을 하고 있던 차였다.  
어느 한국기업 중에는 몇 주동안 문의만 한 후 한국인을 믿기 어려웠던지 미국인 탐정을 고용했고 수개월을 허비하다 결국 그 탐정 마저도 우리에게 지원요청을 할 정도였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사건은 둘둘말린 실타래는 실마리를 정확히 당겨야 술술 풀리게 마련이다.  
결국 연결 고리를 찾는 것이 사건의 열쇄 이다.  한국인만의 미묘한 인간관계를 모르는 미국인이 실마리를 찾는다는 것은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달랐다. 
나의 자존심을 건드린 사건이었다. 
한일병원에서 보내온 자료와 인터폴로의 수사자료를 샅샅이 분석해 보았으나 2달이 지나도록 좀처럼 실마리조차 잡히질 않았다.  
유용한 자료라는 것이 정씨의 여행기록이 전부였다. 
1996년 3월10일 목적지 LA. 
대부분의 도피자들이 그렇듯이 정씨도 로스엔젤레스로 입국했다. 
불안한 마음으로 처음 해외로 향하는 도피자의 심리 경향으로 볼 때 답답한 비행기안에서 갇혀 장 시간을 버티기가 쉽지 않다. 
그러므로 가장 여행시간이 짧고 한국인이 많은 LA를 1차 도피처로 정한 후 다시 제2, 제 3의 장소로 은신처를 옮기게 마련이다. 또 중간 도피처는 친척, 친구 등 인맥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1년 정도의 도피생활로 마음도 안정되고 객지 생활도 익숙해져 영어도 어느 정도 통하기 시작하면서 자신감을 갖고 최종 은신처는 한국인이 별로 없는 한적한 소도시를 찾는게 공식이다.  그러므로 도피자가 중간 도피처에서 안정이 되기 전에 체포해야 하는 것이다. 
그 동안 사건을 보면 거의 대부분의 도피자들이 일년을 전후해 체포된다.  
그러나 정씨의 케이스는 약간 달랐다. 
한국에서 탈출한 후 목적지는 아프리카 가나였다. 
용케도 미국 입국까지는 추적이 됐으나 그 후 종적을 찾을 수 없었다. 
혹시 정씨가 다시 미국에서 출국했는지를 확인하려 했으나 이민국도 비협조적이었다. 
이민국의 답변은 간단했다. 
"한국에서는 범죄자일지는 모르나 입국당시 범죄사실이 없었고 미국에서도 범죄를 진 흔적이 없으므로 선량한 여행자에 불과 하다"는 것이다. 
경찰청이나 인터폴의 협조 공문도 의미가 없었다.  자기네 부서에서 관여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일병원측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재촉이 더해가고 있었다. 
"경찰청에서는 미국 인터폴에 송환을 요청했다는데 협조를 못 받고 있다는 게 무슨 소리냐"며 질책이 대단했다. 아마도 그 들은 내가 실력이 없어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 같아 몹시도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시스템을 잘 아는 나로서는 의뢰인의 말대로 이 문제를 워싱턴 인터폴에 부탁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인터폴은 수사기관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인터폴에 대해 잘못 알고 있다. 
그렇다고 이를 왈가왈가 설명을 하자니 변명으로 들릴까 두려웠다. 
한국에서는 사건이 터지면 영락없이 인터폴에 신변인도를 요구했으며 곧 송환될 것이라는 기사를 접하고 있으니 경찰도 아닌 탐정이 이를 설명한다고 고지 곧 대로 받아들일까 하는것이다.. 
물론 인터폴을 통해 수사협조나 신병인도 작업을 하는 것이 정식 절차이나 그 들이 직접 범인을 체포해 인도하는 것이 아니다.  
이럴수도 저럴수도 없는 곤란한 입장에 놓여 있었다. 

이런 상황을 보고 딜레마에 빠졌다 하는것일까. 
이럴 땐 모든 것을 잊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라는 교관의 말이 갑자기 생각났다.  이 공식은 군 정보기관 근무 시 정보학교에서나 미국서 탐정수업을 받을 때 역시 교관들이 강조했던 공통적인 조언이었다.  이 말은 명언이었다.  한 문제를 놓고 무조건 파고드는것은 우물안에서 세상을 보는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  우물에서 나와 전체를 보라는것이다. 
다른 모든 것은 잊었어도 이 한 마디만은 잊지 않고 있었다. 옳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그 동안의 고정관념으로 수집해온 정보를 모두 잊기 위해 가족과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일주일의 여행을 마친 후 난 정 진석의 처가쪽으로 수사방향을 잡아보았다. 

처가쪽에는 의외로 많은 친척이 미국에 살고 있었다.  
그 중 동서 장 성훈(가명)이 정씨를 도와줄 가장 유력한 인물로 찍었다. 
첫째. 로스엔젤레스와 가장 가까운 라스베가스에 살고있었고 
둘째. 장씨는 정 진석과 나이도 비슷하고 부인과 두 아이들까지 데려갔으니 아무래도 부인은 우선 친동생에게 먼저 도움을 청 할 것이라는 가정은 상식적인 것이었다. 
의뢰인은 당장 라스베가스로 달려 가달라고 안달이었으나 경비면에서나 시간적인 면에서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 동안 우린 미 전국은 물론 전세계 거의 모든 국가에 네트웍을 갖고 있는지라 전화 한통화로 전세계 수 백명의 네트웍을 움직일수 있다.  
당장 라스베가스의 네트웍에게 그를 감시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라스베가스에 없었다. 
사라진 시점은 우연히도 정 진석이 도착한 시기와 일치했다. 
바로 이 친구다.  틀림없이 이 친구가 실마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나 정 성훈을 찾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특별한 안정된 직업이 없이 떠도는 김삿갓이었다. 약 한 달이 지나서야 겨우 그가 뉴욕 거주지를 찾아냈다. 
뉴욕의 네트웍을 통해 그의 아파트를 확인했으나 그는 벌써 이곳에 없었다. 
트레이싱 네트웍을 통해 전화국에 줄을 댔으나 이미 전화는 끊어진 상태였고 전화국에서 조차 체납된 수 백달러의 전화비를 회수키 위해 소재파악 중이었다.  트레이싱 네트웍은 미국의 주로 경제범죄를 전담하는 전문가들의 네트웍으로 대 기업, 통신, 금융 등 거의 모든 분야의 종사자로 구성, 업무에 필요한 정보를 교환하는 표면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얼굴 없는 가상조직이다. 
직장을 수소문 했다. 
뉴욕시내의 한 미국식당에서 메니저로 일하고 있었다. 
친구를 가장,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전화를 했으나 자칭 메니저라는 자가 전화를 받아 정색을 하며 "서부로 돌아갔다, 연락처 를 남기면 본인이 직접 연락을 하도록 하겠다"며 친구라고 소개한 나를 무색케 하며 철저히 보호하고 있었다. 어투로 보아 가까운 사이로 보였다. 
아마도 찾는 사람이 많은 것으로 보였다. 유일한 실마리가 좀처럼 쉽게 풀릴 것 같지 않았다. 
공전에 공전을 거듭하던중 한국의 관할 경찰청으로부터 정 진석의 처가 쪽에서 미국의 누군가와 접촉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왔다.  
모든 데이터베이스 및 정보원을 동원, 이 인물을 색출했다.  
당사자는 의외로 처가식구 쪽으로 사돈의 사돈으로 인척이라고 부르기 조차 에매한 먼 사둔간인 이 종국(가명)이란 사람 이었다.  미국에는 자식들도 많은데 하필이면 어려운 사둔 !. 그것도 직접적인 가족관계가 없는 데 ...  
직감적으로 뭔가 냄새를 맡은 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즉각 모든 일가 친척들의 움직임을 차트꺼지 그려가며 정밀 분석 했다.  
그 결과 공통점이 직 간접적인 경로를 통해 이 사람과 접촉한 사실이 부각됐다. 
당장 이 종국에게 전화를 돌렸다.  물론 신분은 철저히 위장했다.  
탐정이 되려면 어떤 신분으로든 자연스럽게 위장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법적으로도 범죄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한 법을 집행하는 정부요원을 제외하고는 기자, 우체부, 전화국 직원, 교사 누구든 가능하다.  
전화는 물론 Blind Line이라는 추적이 불가능한 전화라인을 사용했다. 
Blind Line 이란 최첨단 통신방법으로 여러라인을 우회해 Caller ID를 혼돈케해 일반 Caller ID는  
물론 발신자 은폐가 불가능하다는 800, 888의 무료전화에까지도 번호가 추적되지 않는 특별한 통신 시스템으로 면허를 가진 공인탐정이나 수사기관에게만 이 서비스 받을 수 있다. 
콜러 아이디란 전화 벨이 울리는 순간 상대방의 전화번호와 이름이 나와 통화전 상대를 확인할수 있는 시스템으로 많은 미국인들이 사용하고 있다.  
마침 아이들만 집에 있었다.  
10살 정도 되 보이는 이 아이는 정 진석의 동서인 장 성훈을 아저씨라고 불렀다. 그러나 정 진석이란 이름은 전혀 처음 듣는 것 같았다.  또 서부에 살고 있던 장씨가 최근 뉴욕으로 이주한 사실도 재 확인 했고 아이의 단어 표현을 통해 장 성훈과는 자주 왕래를 하는 가까운 관계 임을 직감 할 수 있었다. 
이를 조합해 보니 아무래도 여러라인의 2단계 접촉 통로는 동서라는 가설이 성립됐다.  동서가 정 진석의 정착을 도와주며 인근에 살고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섰다. 
이와 때를 같이해 그 동안 비협조적이었던 미 이민국으로부터 정 진석의 입국 신고서 내용을 알려왔다. 
"LA 공항으로 입국, 입국신고서에 게제한 기착지의 주소는 xxxx " 
바로 실마리가 풀리는 것 같았다. 
당장 이 주소를 추적으나 LA 한인타운 인근의 한 호텔 주소로 밝혀졌다. 
과연 미국의 첫 방문자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치밀함을 보였다.  도주 전 이미 미국 입국신고서의 게제 내용을 미리 준비를 했음이라.  이는 어느정도의 미국 시스템을 아는 사람의 안내에서 였을 것이 확실했다.  시 의회 의장을 지냈던 부친의 유명세를 빌어 땅 사기를 친 교묘한 수법답게 도주계획도 사전정보를 수집, 밀도 있는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실마리가 될 동서의 행방은 묘연했지만 수집된 정보를 분석해 볼 때 한국의 처가를 포함해 많은 사람과 단 기간에 수 없이 접촉을 한 사실을 알아냈다.  
그 중 특히 뉴저지주의 한 곳이 눈에 띄게 많았다. 
피의자 정 진석의 연락망이 손안에 들어온 것이다.  처가 - 먼 사둔집 - 동서를 통해 모든 메시지가 전달되고 있다는 추정이 확실해졌다. 가상 각본은 착착 맞아 들어갔다. 
철저한 은신 망이었다.   특히 동서는 주거지가 일정치 않으니 중계인으로는 제격이었다. 
그러나 이 뉴저지주의 상대를 추적한 결과 뉴저지주 포트리 시에 정 은주(가명)의 이름이 나타났다.  정 진석과 성은 같았으나 영문 스펠링을 JEONG로 표기, CHUNG 로 쓰는 정 진석과는 스펠링도 다르고 이름은 전혀 달랐다.  실망은 무척 컷다. 
다시 머리를 정리해야 했다. 
일주일을 아무 생각 없이 보냈다.  그러나 이번에는 도저히 머리 속에서 이 집을 지울 수가 없었다. 
심지어는 꿈에서 조차 계속 그곳에서 정 진석이 비웃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본래 한곳에 너무 집중하다보면 우물 안에 개구리처럼 다른 세상이 안보이기 마련이다. 
머리를 다시 정리한 후 정씨에 대한 자료를 처음부터 샅샅히 재분석했다.  

혹시 ...  
추적을 피하기 위해 한국서부터 이름의 스펠링을 바꿨을 가능성을 두는 등 시야를 넓혀 수사를 시작했다.  그렇다 !. 정씨는 가족과 함께 도피했음에도 불구하고 항공기 탑승자 명단에 정씨 혼자만이 기록돼 있었던 사실에 대한 의문과 함께 번 듯 뇌리를 스쳐갔다. 
혹시 부인의 영문 스펠링을 남편의 성을 따 정씨로 할 수밖에 없었지만 JEONG 로 썼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한국서는 함께 출발을 했으나 가족은 미국으로 바로 보내고 자신은 아프리카를 돌아 돌아 왔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장거리 전화서비스 세일즈 맨을 가장, 전화를 했으나 거주자의 이름을 입수하는데는 실패했다. 
상당히 몸을 사리는 것을 보니 무척 의심이 갔다. 
운전면허국을 통해 이 집 주소는 물론 주 전체에 등록된 운전자를 조사해 보니 정 진석이나 부인의 이름은 없었다. 
일단 이집을 집중 감시하자!. 
아예 이 집 건너편 가로수에 비디오 카메라를 고정 설치하고 움직임을 모두 감시했다. 
그러나 집 뒷편에 있는 주차장에서 차를 타고 바로 그 들의 모습을 잡는 일은 의외로 쉽지 않았다.  
4월 중순 남매로 보이는 두 아이가 학교를 가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5살 7살 정도 두 아이는 손을 잡고 약 한 블록을 걸어가 이웃 집의 차를 타고 학교를 가는 것 같이 보였다. 
피해자측에 비디오를 보냈으나 정 진석에게 아이가 둘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얼굴은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동네사람에게 보일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그들을 감시하는 미국인들은 한국인의 얼굴을 구분하지 못했다. 
그들은 동양 남자가 비디오에 잡힐 때 마다 정씨를 촬영했다고 흥분했고 결과는 항상 헛물이었다. 
이 동네는 일본인 한국인이 꽤 많아 카메라에 수시로 잡혔고 20년전에 찍은 주민등록의 사진만을 들고 있는 그들에겐 그럴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사실 20년째 미국생활을 하고있는 나 조차도 미국인을 보면 그게 그사람이니 누굴 탓하겠나. 
감시원을 늘리고 그 집을 들락 거리는 모든 차를 미행, 얼굴을 알아볼 수 있도록 확대 촬영할 것을 지시했다.  또 모든 차량의 등록자를 조사했을나 정 진석은 없었다. 
며칠 후 한 남자가 카메라에 잡혔다.  
일요일 아침 인근의 일본식당에 들러 몇몇 한국인과 30분간 미팅을 한 후 집으로 돌아가 두문불출 이었다. 
식당이 오픈한 시간이 아닌 것도 그렇고 30분만에 헤어진 것도 그렇고 무척 의심이 가는 인물이었다.  모습이 정씨보다는 살이 찐 것 이외에는 흡사한 점이 많았다. 
피해자는 이 사진에 많은 기대를 했으나 사진을 받아본 후 무척 실망을 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때부터 나의 일과는 감시원들이 보내오는 비디오를 하루종일 보는 것이었다. 
고정된 카메라에서부터 감시원들이 하루종일 촬영한 비디오를 보려면 24시간도 모자랐다. 
그렇다고 한 장면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실망에 실망을 거듭하던 6월 15일 또 다른 남자와 두 여자가 비디오에 잡혔다. 
남자는 옆 모습만 잡혀 얼굴이 분명치 않으나 정씨라는 예감이 확실했고 두 여자중 한사람은 정씨의 부인일 가능성이 높았다. 
며칠 후 비디오를 받아 본 피해자 측은 남자의 모습이 정씨와 흡사하며 한 여자는 정씨의 부인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수배자 정 진석은 뉴저지주에서 한인들이 집중 거주하는 포트리에 개인주택을 렌트해 살고 있었다. 
수사에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곧바로 뉴저지주의 관할 뉴왁 이민국 수사과에 상황 설명을 하고 협조를 요청한 후 수사관을 배정 받았다.  또 영사관을 통해 한국의 인터폴로 송환절차를 밟았다. 
"이민국에 서류 X,Y,Z 및 협조공문을 보내 주십시요" 
일주일 후 이민국 수사관에게 재확인을 했으나 못 받았다는 것이다. 며칠간격으로 계속 확인을 했으나 대답은 마찬가지였다.  한국 인터폴은 절차에 따라 워싱턴 인터폴에 서류를 발송 이민국에 전해 줄 것을 당부했으나 워싱턴 인터폴과는 연락이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몇주 후 그 수사관의 마지막 답변은 서류도 없이 더 이상 이 케이스에 메달릴 수 없다며 손을 때겠다고 통보를 해왔다.  우린 그에게 너무 실망을 시켰다.  아니 그는 우리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린 그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며칠간 사정 사정을 했더니 우리의 협조요청 공문 일체를 수퍼바이저가 모두 회수해 갔다는것이다.  
바로 수퍼바이저에게 전화를 했고 매일 수차례씩 메시지를 남겼다. 
지성이면 감천인지 귀찮아서 인지 약 일주일 후 어느 수사관으로부터 리턴 콜이 왔다.  
수퍼바이저는 "Big Shot"이라 직접 일선에서 수사를 하지 않는다며 자신에게 이 케이스를 배당했다는 것이다.  
미국의 수사 시스템은 각 수사관이 정해진 권한을 갖고 수사를 하므로 이를 감시하는 수퍼바이저는 접촉이 어려운 꽤 높은 직위이었다.  
일이 쉽게 풀리나 싶었다. 
즉시 이민국이 요청에 따라 수배자의 체포영장 등 공문 등을 인터폴에 요청했다.  
매번 하는 일이지만 특히 체포영장의 발부 사실이 언론에 공개되지 않도록 재삼 당부했다.  
왜냐하면 수배자도 체포하기 전에 언론에 보도돼 면전에 서 도망치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뼈아픔을 수 차례나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 때는 기자들이 무척이나 얄밉고 원망스러웠지만 10년 이상 언론에 몸담은바 있던 나로서는 원망도 이해도 할 수 없는 묘한 입장이었다. 
97년8월 마침내 창원지방법원에서 하 형국판사에 의해 소리 없이 영장이 발부됐다. 
경찰청은 즉시 모든 서류를 영문 번역분과 함께 미국 인터폴 본부인 워싱턴 인터폴로 보내 뉴왁 이민국에 전달해 줄 것을 요청했다.  
번거롭기는 하나 범인인도협정이 없는 한.미간에는 어쩔 수 없는 국가기관간의 절차이다. 
그러나 수 백개 국가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업무에 짓눌린 미국의 인터폴 측은 우리의 생각처럼 신속하게 움직여 주지 않았다.  
특히 워싱턴 인터폴 본부는 담당 수사기관으로부터 공식요청이 있기 전에는 사설탐정과의 공식적인 업무협조를 할 수 없다는 입장이라 나의 재촉은 허사였다. 
인터폴은 대민기관이 아닌 각 국가의 수사기관 대 수사기관의 협력기구이기 때문이었다. 
어쩔수 없이 이민국의 수사관을 재촉했다.  
젊은 이민국 수사관은 혈기가 넘치고 적극적이었다.  
빠쁜 업무와 출장에도 불구하고 틈만 나면 워싱턴 인터폴에 전화를 해 서류를 재촉했으나 담당자와 통화하기에는 하늘에 별따기 처럼 어려웠다는 것이다. 
피해자 측과 한국의 경찰청 측에선 며칠간격으로 진전상황을 확인해 왔고 나 역시 매번 같은 대답만 할 수밖에 없었다.  
근본적인 이유는 수사의 지연이 아니라 수배자가 도주 할까하는 우려에서 였다.  
지방법원에서 얼마나 오래 기자들의 눈을 빼 돌릴 수 있는 가는 아무도 보장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걱정하지 말라며 애써 태연한 척 했으나 매일 도망자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나로서는 더욱 피가 마르는 하루하루 였다. 
이 와중에 사무실로 이상한 전화들이 매일 수차례씩 줄을 잇기 시작했다. 
전화를 역으로 추적한 결과 대부분의 전화는 정씨의 거주지 인근에서 걸려오는 전화 로 매번 다른  전화번호가 추적 됐으나 등록자는 같은 회사였다.  회사이름이 사설탐정소 같았다.  
매번 같은 미국인의 목소리로 나를 찾고는 끊는 것이었다. 
이 같은 전화는 미국의 남부, 중부, 서부, 동부등 각지역에서 계속 같은 수법의 전화 였으며 나의 움직임을 주시하는 것 처럼 보였다.  전화번호도 매번 같은 지역의 전화번호였다. 
정씨를 줄곳 감시해온 현지 탐정이 어느 날 정씨가 감시하는 것을 눈치챈 것 같다는 통보는해와 바로 철수시킨 일, 또 정씨와 연관된 사람들에게 전화 시 BLIND LINE 사용을 깜박 잊은 일이 갑자기 머리 속을 스쳐갔다. 
온갖 공상으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제부터 서로 감시하고 감시당하는 두뇌전쟁이 시작 된 것이다. 
자칫 잘못해 정씨의 신경을 거스른 다면 이제 것 쌓은 공든 탑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벼랑 끝에 서있는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왠지 전화도 도청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아예 전화라인에 도청 탐지기를 부착하고 사용했다. 
정씨는 가끔 주위를 경계하기는 했으나 애타는 남의 사정은 아랑곳 않고 특별히 하는 일이 없이 골프나 즐기는 등 평온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부인도 역시 매번 인근 미장원에서 시간을 보내는 모습만 잡혔다. 
그러나 운전할 사람은 2명뿐인데 그들은 승용차 2대 미니 밴 1대등 모두 새차로 3대나 소유하고 있었다.   사치스런 생활을 하지는 않았으나 비교적 풍족스러워 보였다. 
벌써 수 차례를 조사했으나 정씨는 매일 운전을 하는데도 자동차국 (DMV)에는 운전면허를 소유한 흔적이 없었다. 
아직도 이 부분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드디어 천신만고 끝에 2달 후인 10월10일 이민국에 서류가 도착했다고 알려왔다. 
체포일정을 다음 주말 경으로 결정하고 체포작전을 세웠다. 
10월17일 아침 7시 어둠이 채 가시기도 전에 10여명의 이민국 수사관들은 집 앞에 도로 공사를 가장, 공사장비를 동원해 감시 조를 배치하고 출입구를 통제한 후 양쪽 길 끝에는 체포 조를 배치해 만반의 준비를 했다. 아침 8시30분 마침내 정 진석이 두 아이와 함께 차로 집을 나섰다.  
학교를 데려다 주려는 것 같았다.  
바로 뒤를 이어 부인이 어느 할머니와 함께 또다른 차로 뒤를 따랐다.  
챈스였다. 
길 양옆에 대기해 있던 체포조는 이를 놓칠세라 덤프트럭으로 길을 막고 도주로를 차단했다.  
정 진석의 일행이 차를 뒤로 빼려하자 집 앞에서 공사장비를 손보는 척하던 수사관들은 어느새 권총을 빼들었다. 
꼼짝마 !. 
손을 높이 들고 모두 하차하라 !.  
다리를 벌리고 !. 두손은 머리 뒤로 깍지 끼고 !. 무릅을 꿇고 !. 그대로 엎드려라 !. 
상황 끝 ... 
정 진석의 집 앞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아이들은 하늘이 무너지도록 비명을 지르고 팔닥팔닥 뛰며 울기 시작했다. 아이들도 상황을 짐작하고 있는것처럼 보였다. 
수배 당사자인 정 진욱은 오히려 담담한 표정으로 수사관들의 명령에 순순히 응했다.  
부인은 약간 당황하기는 했으나 그동안에 보여준 모습대로 당당한 표정이었다.  
할머니는 한국에서 며칠 전에 방문한 정씨의 장모였다. 
할머니는 겁에 잔득 질린 모습이었으며 마치 우리를 한국에서 보낸 해결사로, 가족을 납치하려는 것이라 생각했던지 "너희는 법도 없냐"며 거세게 항의했다.  
그들 일행은 순식간에 모두 체포됐고 방문비자를 확인한 할머니는 정씨의 아이들과 함께 집으로 들여 보냈다. 
정씨와 정씨의 부인은 이민국 구치소로 이송됐고 부인은 간단한 조사를 마친후 추방 청문회까지 집에서 대기할 것을 명령하고 보석을 허가했다. 
도피자의 정씨는 통역원을 동원 보석을 신청했으나 예상대로 거부됐고 바로 뉴왁 인근 밀번에 소재 이민국 구치소로 이감했다.  
정 진석은 다음날 이민국의 사실조사를 받았다. 
그는 수 백달러의 소액부도 사실은 인정하지만 사기부문 등 일체의 범죄사실을 강력히 부인했다. 
또 한국의 체포영장에 대해 죄가없는 자신에게 영장이 발부될 이유가 하나도 없으며 허위서류라고 당당하게 소리치면서 까지 항의했다고 이민국 수사관들은 전했다. 
정씨가 체포된 후 이상하게도 매일 걸려오던 이상한 확인 전화도 없어졌다. 
1차 상황 끝 !. 
10월 22일 정 진욱은 뉴왁에서 60마일 떨어진 트렌톤 소재 멀서카운티 형무소로 이송 됐다. 
이곳에서는 1주일에 1회에 한해 전화나 면회가 허용되는 등 행동이 무척 제한 된 임시 형무소이다.  
이민국 수사관들의 이야기로는 정씨가 조용히 형무소 생활에 적응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전했으나 정씨 자신은 지옥같은 하루하루 였을것이다. 
11월2일 다시 정식 형무소로 이송되기로 되어있었다.  이곳으로 이송되면 장기 수용되게 된다. 
10월30일 정 진석은 갑자기 마음에 변화를 일으켰는지 아니면 감옥에서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는지 갑자기 자진출국 의사를 밝혔고 곧 추방 청문회에 부쳐 추방명령이 떨어졌다.  
다음날인 31일 정 진석은 1년 8개월의 도피생활을 청산하고 김포공항에 도착, 신병인도차 공항에 대기중이던 사천지방경찰청 호송관들에게 인도됐다. 
정 진석은 경남사천에서 구속조사를 받아오다 97년11월18일 피해자들과의 대질신문에서 범행사실을인정, 지난 98년 5월, 3년의 실형이 선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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